독서와 글쓰기에 대하여
우리는 독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공감합니다. 그런데 그런 독서를 내가 읽고 싶은 것만 골라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쓰기 위해 읽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책읽기도 달라집니다.
읽고 쓴다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활동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래전에 '읽고 쓰는 것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그 결론은 재미난게 의미가 있으면 좋고, 함께 읽고 쓸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읽고 쓰기 위해 공부하면 재미있는 일상이 됩니다.
동양의 주역에서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의 존재로 인간이 서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인간은 하늘을 보고 땅의 이치를 탐구하였습니다. 초기에는 그렇게 발견한 것을 말에서 말로 전했습니다. 그것이 초기 경전의 형태입니다. 그러나 언어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문자가 발명됩니다. 문자는 지금의 SNS의 시작이며, 시공을 넘는 불멸의 수단입니다. 이 문자를 통하여 우리는 몇 천년전의 기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문자를 기록한 책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까지 같은 문명권입니다. 문명권을 아우르는 문자의 대중화가 책입니다. 나무에서 종이를 만들어 냄으로써 인류는 보편적으로 책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신분과 성별을 타파할 수 있었으며,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책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최근에 인문학을 접할 수 있는 도서관, 강연 등 공간이 늘어났으나 사람들은 계속 듣기만 합니다. 읽고 듣는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다독은 삶의 기예가 아닙니다. 계속 이런식으로 진행되면 읽는 자와 쓰는 자 사이에 또 다른 계급의 장벽이 생깁니다. 삶을 창조하는 기회가 박탈됩니다. 따라서 쓰는 활동을 해야하는데, 처음부터 베스트셀러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그저 글을 쓰는 보편적인 활동을 하면 됩니다. 알고, 쓸 수 있는 만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고 의미있는 삶은 어떤것일까요? 차서를 부여하면 됩니다. 차서란 시간과 공간의 기준입니다. 이 기준을 통하여 우리는 삶을 조율하고 기준을 정할 수 있는데, 그 방법이 읽고 쓰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뇌에서 생각하여 말하기 위해서 혀를 사용하듯, 글을 쓰기 위해서는 손을 사용하면 됩니다. 노트를 펴면 생각이 떠오르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쓰기는 몸이 활발하고 명랑하며, 편안해집니다. 생명은 애로스적 창조입니다. 사유를 창조해 보십시요.
옛날에 여성은 아이를 낳느라 창조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아이를 선택하기에 그 에너지를 다른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언어와 글을 창조하여 세상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빨리 잘 쓰는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그저 간절하게 발원할 뿐입니다. 나의 내면에서 '나는 쓰고싶다'는 열망을 끌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러면 집중력이 생깁니다. 욕망과 사유(생각)의 패턴을 발견하고, 전환합니다.
글쓰기를 통하여 사유(생각)의 패턴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6개월의 창작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피곤한 상태에서는 언어가 창조되지 않습니다. 또한 감정을 소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힘을 낭비하면 언어의 생성이 안됩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잘 조율해 나갑니다.
조리있게 쓰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차서를 부여하여 차이를 생성해야 합니다.
동의보감에 인생은 125년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글쓰기도 기, 승, 전, 결의 리듬을 따라야 합니다. 맥락을 정하고, 교감을하며, 사유(생각)과 신체가 융합될때 새롭고 재미있는 언어가 생깁니다.
참고
고미숙의 독서와 글쓰기에 대하여...